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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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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석

(0003)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금빛 단정한 쌩머리에 눈부신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 예수에 익숙해 있었다. 정말 그런줄 알았다. 천사들도 심지어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유대인들과 이방인이라는 사람들도 모두다 다 외쿡 사람, 백인들인줄 알았다. 그렇게 알고 설익은 풋과일 시절들을 보냈다. 물론 대가리가 영글어 뇌속에 자질구레한 잡념들과 갖은 욕망과 도전들이 버무려지면서부터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나 네상에나 미개하고 약소한 유대민족들의 처절한 역사를 알게 되었다.

2001년 초쯤 정말 키작고, 왜소한 짧은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매부리코의 매우 평범한 한 남성의 얼굴이, 과학적으로 분석된 예수의 얼굴이라며 영국에서 발표됐었다.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마치 오랫동안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거짓말에 속아 왔다는 느낌?
그 위대한 예술가들이, 상상 속의 예수를 아주 평범하고 그저 그런 모습으로 그릴 수는 없었겠지만, 혹시나 그랬다면 그래도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외모에 대한 의존성이 매우 높다. 나도 좀……
반면 저런 평범하고 화려하지 않은 외모와 체격으로 이적과 치유를 행사하고, 종교 개혁을 부르짖었을 예수의 모습이 훨씬 더 ‘사람의 아들 (인자)’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됐다. 

처음 만난 예수는 그저 ‘신의 아들’일뿐이었다. 성탄절은 우리 모두의 즐겁고 기다려지는 이벤트였고,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설교로 주입된 성탄절의 신비하고 거룩한 이미지는 굳건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예수 자체는 아폴론적인 엄숙함과 정적임, 경건함의 표상과도 같은데 반해서, 성탄절을 즐기는 우리들은 지극히 디오니소스적인 축제와 욕망과 환락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산타 할배’까지 가세해서 그러한 디오니소스적인 환희를 더욱더 부추긴다.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죄다 마찬가지다. 들썩들썩.

그런데 말입니다.
부활절은 또 전혀 다른 분위기다. ‘성금요일’, ‘베드로의 부인’, ‘가룟 유다의 배신’,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제자들의 꿀잠’등등의  장치를 극적으로 잘 매설해 놓아서인지 일단 부활절 전의 금요일, 토요일은 경건과 엄숙을 찾는다. 마침내 부활절 아침에 이르러 그동안 닥치고 경건을 떨었던 모든 ‘교회사람 (나는 이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그들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지, ‘크리스챤’이라고 불리울만큼 예수와 종교적, 사상적, 윤리적으로 가깝지가 않다.)’들은 있는 목청 없는 목청 다 높여가며 고래고래 환희의 찬송을 질러댄다. 그나마 잘 부르면 들을만한데 가끔씩 실력에 비해 너무 어려운 곡을 무리해서 하다보니 듣기도 부르기도 민망한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원시적인 예수의 모습을 너무나도 알고 싶었었다. 원래 그 제 1 삶의 자리 (Sitz im leven = Setting in life)에서 활동했던 그 예수의 모습 말이다. 학문적으로 현재의 우리는 제 3의 삶의 자리에 있다. 제 2의 삶의 자리는 원래의 예수가 가졌던 모든 것들이, 종교화 되고 그리고 로마에서 공인되고 39 + 27권의 정경을 채택하고, 종교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변형되고, 자본주의의 굳건한 토대가 되고 그리고 또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여러 언어의 성경으로 번역되고, 또 자신들만의 신념으로 예수와 여호와의 의지를 해석한 그 무지막지복잡다난횡설수설중구남방지맘대로막무가내이판사판얼토당토한 과정들을 모두 거친 광범위하고 혼란스러운 시간들을 가르킨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 원래 예수의 참모습을 알 수가 있겠는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예수 사후, 기독교는 철저히 사도 바울의 종교가 되었다. 자고로 제자 중에 똘똘한 놈이 있었던 성인들의 사상과 이상은 그나마 큰 변형 없이 잘 전수되었다. 공자의 논어나, 플라톤의 대화편, 맹자 그리고 불교의 아함경도 마찬가지다. 

이런 지경이니, 지놈이 예수의 후계자라느니, 친구라느니 동급이라느니, 동생이라느니 심지어는 예수 자신으로서 다시 부활했다느니 하며 개거품을 뿜뿜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나는 이러한 인간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이나 현실 왜곡은 지들 자유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을 떠받들고 신봉하며 홀딱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의 나는 원시 예수의 모습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상태다. 다만 나의 지식과 지성과 지혜를 근거로, 종교적이 아닌 역사적, 학문적 신념과 가치관을 통해 고백하는 예수의 모습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예수가 구세주인지 아닌지, 실존 인물이었는지 가상의 인물이었는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인도에 갔었는지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살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다. 본질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떠한 존재로 고백할 것인지 하는 나의 선택이다. 그렇기에 시대 마다 그 시대와 배경에 맞게 변화하는 예수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예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면에서 내가 고백하는 예수의 모습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 예수가 실제 살았던 시절의 관습과 사회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제 2의 삶의 자리를 거쳐 내게로 온 그 예수의 모습은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이 분은 물과 같은 분으로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본질을 가진다. 물은 모든 생명체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대표적인 형태인 액체 상태를 비롯해서 기체와 고체 등 다양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아우른다. 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물로 인해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물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현대의 물질주의에 매몰된 교회는, 물, 빛, 소금이 되기 보다는 물을 장악하여 사람들을 조종하고, 각광 받기를 원하고, 소금 간이 베인 맛난 음식을 독차지 하려고 한다. 물이 되어 생명이 살아나고 활력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물이 되어 더렵혀진 고귀한 가치들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씻은 물은 분명 구정물이 되겠지만 세상은 보다 아름다워질 것이다. 작지만 은은한 빛이 되어 어두운 곳을 비추고 길 잃은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소금이 되어 맛깔스러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녹여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의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없이 그토록 염원하는 천국에 어찌 갈 수가 있을까. 천국이 그렇게 만만한 곳일까.

 

예수는 그 짧은 생애 동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너무도 뚜렷하고 강렬하게 보여주면서 숙제를 내줬다. 하지만 나는 결국,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고 의무와 욕망이 쇠잔해지고 나서야 밀린 숙제를 벼락치기 하듯 성급하게 끝내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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