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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묻은 단상 (斷想) 2022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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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감정이 묻은 단상 (斷想) 2022 (완료)

221231
시작은 여름, 키움도 여름, 보살핌과 성숙함으로의 지혜는 겨울, 완성은 바다가 되고 그 여름과 그 겨울의 모든 것이 녹아 있으리. 여름은 겨울의 비밀을 들추고, 겨울은 여름을 살려내리. 겨울은 여름의 휴식이고 여름은 겨울의 꿈이요 이상이다.


왜 사람들은 '마지막'과 '시작'에 의미를 두나. '사망'과 '죽음', '소멸'과 '발원'. 하지만 나는 그 '바다'와 그 '강머리'를 생각한다. 하루하루는 '보는 날'과 '못 보는 날'들일뿐. 아름답고 소중한 모습들을 담기에 바쁜 그곳이 강머리 어디쯤 일텐데, 마음은 이미 바다 위를 날고 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 하지만 변할 것은 숫자 뿐이다.
우리가 지닌 모든 것들은 그 모습 그대로. 다만 그 검푸른 상자는 이제 사라졌으면.


그러나 남은 한쪽 눈으로, 아침이면 해를 볼 수 있고, 밤이 되면 별을 볼 수 있다.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에 햇살을 느낄 수 있고, 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품을 수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남의 아픔을 아파해 줄 수 있는 가슴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원망할 시간이 없다. 지팡이 짚고 가끔 집 밖으로 산책을 했다. 한쪽 눈이지만, 보이는 것만 보아도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다리에 힘이 없어 산책이 어렵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보이는 앞산 숲의 색깔이 아름답다. 감사하다.
인생이란 바로 '여기(here)'와 지금(now)'이다. 행복을 느낄 시간과 공간과 사람은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한 번이라도 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내가 바로 즐거움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

한 번 꼬아서 보면, 이런 생각을 갖는 것 마저도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내가 바로 즐거움'이 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세를 지향하다 보면 현세를 등한시할 수도 있으므로, Here and Now와 There and Later가 조화롭게 어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2년의 마지막이 왔고, 곧이어 2023년의 시작이 온다. 여전히 정 많은 우리 사람들. 팍팍하고 메마른 삶 속에서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인가에 대한 아쉬움을, 톡으로 메시지로 대신하고 있다. 전해져 오는 인사말들을 보며, "이런 게 다 뭐라고"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여, 그대들의 선한 소망과 바램들이 활짝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한 새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221230
깊은 밤 그리고 이미 시간은 내일을 가리키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오늘에 머물고 있다. 오늘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 진실된 배려와 이해가 가득한 그곳은 그저 고요한 바다. 요란스러운 미사여구나 감정의 나들이도 없이, 하지만 또 하나의 발견 속에 커져만 가는 그 깊은 마음. 얼마만큼 더 커질 수 있을까. 얼마만큼 더 깊어질 수 있을까. 얼마만큼 더 넓어질 수 있을까.


221229

그대들의 씨앗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신곡] 지옥 26곡 118-120, 단테-

우리는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산과 계곡을 방랑한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리고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발터 벤야민은 근대적 인식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식, 곧 진정한 차원의 앎이란 주체와 객체의 직접적인 소통에 있다고 보고, 이러한 매개성을 매체로서의 언어에서 발견한다. 그래서 벤야민에게 언어는 단지 인간 사유의 표현이나,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인식과 경험의 전제조건이자 새로운 철학을 위한 근대 인식론의 돌파구로 제시된다.
-[인식비판'으로서의 언어 - 발터 벤야민의 초기 경험개념 및 언어이론 연구 ], 이진실-

소통이 단절되어가는 작금의 사회에서의 인식과 경험은 왜곡되고, 실체적 또는 상징적 진실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고 조종되는 세상이 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체험한 빈곤은 나에게 원한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변함없는 마음, 그리고 묵묵한 끈기를 가르쳐 줬다. 내가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었다면 그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또는 나의 결점에 있는 것이지, 내가 태어난 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나의 권리다.
-카뮈-

이 사람을 흠모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만큼 나의 이성을 사로잡는다.


221228
내 힘의 근원이요 방패가 되시는 이여. 어찌 그리 아름답고 자비로우신지요. 나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나의 마음에 자라거늘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랑의 뜻을 배우니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김남조-

아무리 애써도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있다. 근심과 연민과 사랑과 존경과 의지와 도움과 정열과......
그리고 느꺼운 개념들이 모두 고르게 섞여 있는 이것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때로는 눈을 감고 귀를 열어보라. 오랫동안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무언가가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것을 내면에 들이고 내 몸이 되는 것을 느껴보라. 눈을 감으면 저 앞을 향했던 나의 시선은 순식간에 나의 내면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나의 내면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자코모 레오파르디-

남녀노소 가릴 거 없이 모두들 귀엽게 보인다. 왜 이러지? 병인가.


221227
주인공들과 플롯은 확정되었다. 이제 1장은 시작되었고 사건들의 명멸과 심리적 작용 반작용, 그리고 복선과 철학적 메시지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이어질 것이다. 모든 서사는 별개의 우주이고, 그곳은 사랑이라는 영원불변의 물질이 가득한 곳이다.


생각이 잠시 멈춤. 정신적 유산의 불멸이 가능할까 생각. DNA로 전달? 내가 향유했던 사랑의 시간들은 어디에. 이미 나의 일부로 체화? 거쳐온 모든 시공간의 결정체. 움벨트와 움게붕을 오가며.......
생각이 다시 움직임.
'그대는 모든 곳에 있다.'


이 고질병. 썩을...... 한순간에 나를 침몰시킨다.


어딜 가나 끊이질 않는 이 징그러운 안내방송들. 참기가 힘들다.


221226

그는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언어와 어조, 또 인물의 몸짓과 자세를 묘사하면서 그 본질을 단번에 꿰뚫고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현실적 묘사'라고 부를 수 있는 그것은 자신의 언어를 사물에 침투시키고, 거꾸로 사물이 자신의 언어에 들어오게 하는 과정에서 실현된다.
-[단테가 읽어주는 신곡], 박상진-

자신의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사물이 나의 언어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현실적 묘사보다는 은유를 선호하는 나의 언어는 누구와의 소통을 위한? 나만을 또는 우리만을 위한?


버스나 지하철을 타다 보면 유난히 사람들이 몰리거나 한산한 차편이 있다. 단 몇십 초나 몇 분 차이로. 인생도.


임산부 석에 앉아 핸드폰을 즐길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저 늠름한 수퇘지는 누구일까? 떼버려!


작은 방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 벽에는 온통 그 아이의 지난 시간들과 소망과 믿음과 우주가 그려져 있다. 바람 한 줄 없는 차분한 겨울의 시간들이 응결되어 있고, 모서리에 매달려 방안을 환하게 비추는 또 그 겨울의 눈부신 햇살.
빈 상자 안에 초조하게 갇혀 있는 아이......때때로 찾던 그 작은 방에 이제는 머무르게 되다.


어떤 냄새를 맡으면 누군가, 무엇인가 연상된다. 나는 '개 같은 습성'을 가진 인간인가.


키가 큰 사람들이 더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다니는듯해 보인다. 인간은 압도적인 우위를 확실히 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통 속에서 우러나온 침잠과 기도와 명상으로 채워진 내면을 가진 사람은, 다른 이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고통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유희와 유쾌함이다. 더불어 죽음이라는 안식도 갈망한다.


쇼핑 없는 박싱데이로군.


왜 여성들은 지하철 자리에 앉아서 두 다리를 앞으로 쭈욱 뻗는 거지? 성장판 자극? 그럴 나이가 오래전 지났는데. 혹시나 하는 희망인가.


이 책-[최초의 인간]-이 그토록 오래 출판되지 못한 이유,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빛을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도 솔직하고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솔직함과 절실함이 내 속에서 먹먹한 울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카뮈] 최수철-

[최초의 인간] 집필을 채 마치지 못하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즉사한 카뮈. 이 책은 자전적인 이야기로서, 세부적이고 사실적이면서 삶에 대한 비전이 진솔한 내면의 고백을 통해 절실하게 펼쳐진다고 한다.
'솔직함'과 '절실함'. 내 삶은 얼마만큼 솔직하고 절실한가. 무엇을 절실하게 찾고 있는가. 이러한 종류의 수 만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221225
전하지 못한 마음은 늘 깊은 아쉬움을 남긴다. 어디 한 두 가지일까마는, 닥칠 때마다 겪는 그 무거움은 달래기가 쉽지 않다. '그때'가 갖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


내 오랜 빈 상자. 어찌 이리도 채우고, 빛을 들이기가 어렵단 말인가. 때가 되면 찾아오는 이 갈급한 초조함은 도대체 어찌하면 지워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음에 ......


221224
이리도 차분한 크리스마스이브날. 그리도 차분한데, 마음 전체를 일렁이게 하는 거대한 파문에 몸이 흔들린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내일 오시는 이의 영원한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Van3ssa 🩺 Zheki 🙏 Dany 🎹님의 이미지 입니다.


221223
꿈만 같은 그 하루를 숫자의 틀에 맞춰 본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 하루가 날아가 어느 먼 곳을 떠돌지라도, 평생의 여운으로 남으리. 무거운 배와 한적한 쉼터들. 차가 막히고 지하철은 연착되고, 약속에 늦고, 주머니는 가벼워지고, 바램 같지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그 숫자의 틀에 갇힌 하루여.


221222
앉아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4 시간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그런데 yes pain yes gain.


거센 바람들이 그어 놓은 굵은 화살표들이 가득한 오늘. 그러다가도 어디든 실내로 들어가면, 고요하고 맑은 세상이 평화롭게만 보인다. 우리의 여정도 그 속에만 머물길.


거센 바람도 범접하지 못하는 산들의 마을 같은 오목한 마음의 자리. 끊임없는 노래와 이야기, 마른 샘물과 희미해진 열락의 기억에 대한 아랑곳없음, 뱀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간들, 우주의 반을 모두 알게 되고, 꼭 맞게 겹쳐진 원과 점. 가벼움과 무거움의 결합. 8천 마일의 거리가 한 점에.


221221
눈이 수북이 쌓인다. 도시 속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하얀 헤르메스들이, 마음속에서는 고흐가 그렸을법한 미완의 풍경화가, 머릿속에서는 그대가 수줍게 흥얼거리는 캐롤이, 내 눈 속에는 새벽 가로등 불빛 속에 갇힌 겨울의 요정들이 어우러진다. 너무 자주, 많이 오지 말길.


사람의 습관은, 가고 나면 다른 게 오는, 가지의 잎과 같기 때문이니라.
-[신곡] 천국 26곡 137-138, 단테-

못된 습관들이 지고 착한 습관들이 피어나기를.


이상하다. 바흐의 파르티타에 익숙해지고 나니, 평균율이 따분하게 느껴진다. 하여간 사람의 감각이란 지극히 간사하다.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듯.


아무리 꾸미고 가꿔도 자신이 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지. 사람의 아름다움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전적으로 차량 위주로 설정되어 있는 신호등 시스템은, 보행자의 무단횡단을 부추기는듯해 보인다.


221220
그대여 오시나요.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마음 주머니 한가득 사랑을 담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사뿐히 걸어오시는 이여.


읽고 또 읽고. 소란스러운 지하철 안에서 읽는 그 편지는 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 Extreme Resonance!


이른 아침마다 만져지는 두 개의 이야기. 영과 육의 하모니. 성과 속. 백과 적. 그런데 이 상반되는 두 가지들은 상호 의존적이며, 존재 의존적이다.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모자를 쓰고 다니는 여성들은 아침에 머리를 감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합리적인 추측을 해본다.


까까 두 개가 귤 두 개가 돼서 귀환했다. 선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나의 친절은 보잘것없지만, 우리의 선함은 위대하다. JS, EC 고마워요.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불현듯 BJ 할배가 떠올랐다. 진한 루이지애나 사투리로 웅얼대며, 처음 만난 나를 당황하게 했던, 엘비스를 좋아해서 거의 평생 동안 같은 머리 스타일을 고집했던, 화장실에서 만날 때마다 손을 자주 깨끗이 씻어야 한다던, 내가 떠나는 날, 나를 가리키던 검지를 거두고 엄지를 치켜세웠던, 몇 년 후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마지막 소식을 남겼던, 사람.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추억의 옷을 차려입고, 어떤 잔영을 두르고서 나설 수 있을까.


왜 나는 이리도 궁금한 게 많을까. 애기도 아닌데.


221219
그대들은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삶은 행복한 여행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행복해야 합니다. 그대들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한결 같이 행복해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평생 동안 찾았으면서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상상과 바램 속에만 존재하는 '그것'이라 여기며, 찾았다기보다는 기다렸다고 하는 것이.......
어느 날, 고개를 들어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문이 열렸다.


삶이란, 다른 이들을 나와 구분 짓게 하는 것들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우주에 유일한 존재임이 분명한 나를, 저 셀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 지금껏 어떤 것들을 찾았는가.


'기억'이란 시각과 청각의 협동으로 만들어질 때 더 뚜렷해질 수 있을까.


예쁘고 잘생기고 귀여운 사람들은 많지만 아름다운 이들은 많지 않다. 그 광활하고 공허한 내면은 어떻게 채울 것인가.


아이들은 치고받고 싸우면서 화해를 배우고, 때려 박으면서 조심성을 배운다. 속은 쓰리지만 어쩔 것인가.


잘 모르겠다. 왜 다른 이들이 웃고 떠들며 노는 것과, 온갖 음식들을 먹는 모습을 보는지, 그리고 왜 일일 드라마의 줄기는 수 십 년 동안 변함이 없는지, 그걸 보고 계시는 어머니는 여전히 '못된 xx'을 보며 흥분하고 계시는지.


애써 키운 농작물과 가축을, 삶의 터전을, 전 재산을, 그 어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을 다 합쳐도, 억울하게 스러져간 여린 자식을 가슴에 묻는 비통함에 비할 수 있을까.


책을 '기억의 창고'로 생각했던 단테. 나는 이 '단상'들을 '기억꽂이'라고 이름 짓는다. 그래 전부는 아니라도, 적어도 본질만큼은 슬쩍 꽂아 놓자.


221218
고요함 속에 잠시 내 정신을 맡긴다. 내면의 자유 (Freedom)와 외면의 자유 (Liberty)의 두 길. 얼마 전, 프리덤을 등지고 리버티의 도상에 올라섰는데, 나는 프리덤을 억압으로 인식했을까.


221217
이젠 베토벤과 산책을 시작한다. 아! 첫 곡부터 내 심장을 찌르는 그 강렬한 선율.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바흐가 음계의 기초와 토대를 세우고, 베토벤은 그 위에 지붕과 외벽을 만들었던 것인가. 그런 표현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저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은 혼이 담겨있고 나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한다.


221216
오늘도 그 동네를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기나긴 하루. 많은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는 나비의 날개를 타고, 나는 그 속에서 거대한 변화를 꿈꾼다.


221215
춥지만 바람의 늦잠으로 너무 거칠지 않은 새벽. 살포시 내려와 내 마음에 내려앉은 믿음의 고백.
주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저희들에게도 영원히 머물게 하여 주소서. 가엾이 여겨 주소서.
기쁨과 행복과 영감이 가득하게 하소서.


지역 소멸을 어떻게 막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먹고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려도 몰려갈 것이다. 뻔한 답을 가진 쓸데없는 의문 제기가 너무 많다.


문자가 말보다 우월하다? 동의하기 어렵다. 그나마 정제된 글이라면 생각해 볼만하겠다. 인쇄술의 발달에 따른 글의 전파력에 한 때나마 이점이 있었지만, 이젠 기술의 발달로 말의 전파력도 강하다.


내가 생존을 제외하고,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JS 고마워요. 가치와 필요성을 떠나서, 선한 보답은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여느 나이 든 사람들과 다를 수 있기를 꿈꾼다. 얼마만큼이나 가능할까. 지금도 때로는 10대 때 덧칠하던 멋과 외로움을 쫓고 있다. 그럼 나는 다를 수 있을까.


221214
흡연자들의 고난주간이 시작됐다.


‘강추위‘ ’걍추위‘ ’강추워‘ ‘걍추워’. 바람이 쏘다니는 길목을 피해 다닌다. 더 추운 곳에서 살아 본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열차가 지하철 역사 진출입할 때 MP3 음악 파일의 음질이 일그러진다. 전자기파가 강하게 일어나는 듯.


어떤 여성이, 앉아있는 내 무릎 위로 큼지막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아팠지만 쿨한 척. 미안했는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봤다면 위로의 눈웃음을 날려 드렸을 텐데.


남자가 꼭 ‘내일의 주인공’의 자리에 앉아야 되겠니? 떼 버려.


빈자리에 못 앉으면 그 벌로 사형을 언도받을지도 몰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아 정말 미치도록 쳐보고 싶다. 파르티타!


JS가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다는 취지로 EC가 말하지는 않았다.


삶의 길을 빨리 가는 것보다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장자가 말했는데, 나는 어찌 가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을 해야 할까.


단테는 왜 천국을 바퀴로, 연옥을 산으로 그리고 지옥을 계곡으로 묘사했을까. 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바퀴는 우리가 사는 현세를 지탱한다. 셀 수 없는 이들이 천국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리고 시간의 무한한 길을 따라 굴러가게 한다. 움직임이 없으면 그곳은 모든 것이 소멸한 곳. 그렇게 천국은 바퀴가 되어 세상을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근원이다.
산은 힘겹게 오르는 곳. 정상에 이르기까지 고되고 숨찬 시간들 속에서 고뇌하며 몸부림 친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숱하게 유혹하는 곳. 마침내 오른 정상은, 천국을 바라보며 떠나는 또 다른 시작이다.
계곡은 거센 물줄기가 안식과 보금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안주나 평안이 없다. 물살의 아우성과 소용돌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되어 옥죄어 오고, 서 있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되는 곳. 그리고 그곳은 산과 산이 맞닿은 곳에 있다.


221213
오늘 밤에 오기로 돼있던 ’악!추워‘가 새벽부터 얼씬거린다. 올 들어 제일 추운 때에 약속들이 몰리다니.


엇? 이건 그 사람의 향기다. 단지 같은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처음 보는 이가 친근해 보인다.


오늘의 질문.

나 멋져요?

JS는 눈을 크게 뜨며 약간 두터운 목소리로.

네에, 멋져요!!!

옆에 있는 EC는 말없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끄덕. 고마워 동생들.


알고 싶었네. 그대의 오랜 침묵을, 이른 날의 엷은 가슴에 아로새겨졌을 나르시시즘의 배반을, 간절했을 기도를, 고통 속에서 핀 고귀한 사랑을.
무겁고 두텁고 오랜 소리가 되어, 도돌이표를 넘지 못했던 소망을.
기다렸네. 침묵의 끝을, 필리아의 흔적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보게 되었네. 그대의 짧고 향기로운 미소를, 머리 위로 쏟아지며 내 마음을 눈부시게 하는 정오의 햇살을, 나약한 미움을, 겨울 같은 투명함을.
깊고 낮고 오랜 소리가 되어, 그 이중창의 끝마디까지 이어지는 소망을.


오늘따라 솔솔 풍기는 소주 냄새가 여기저기서 목격된다. 나는 그 발원지가 어디인지 금세 알 수 있다. 퇴근 무렵엔, 나이 좀 든, 얼굴이 발그스레한 남성들. 안주는 빈대떡이나 파전?


사람들이 이토록이나 동영상에 열중하는 정도의 반만큼만 노력을 기울여도 뭐든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지성과 예절을 갖춘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리고 모두들 조금만 천천히 살았으면.


뉴스를 보다가 경악했다. 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뽑은 사람들로부터 이리도 어리석고 천한 존재로 대우받는가.


221212
강풍과 강추위가 마을 어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삶 속에서 발견하는 소중한 아름다움들. 겨울에는 빨간 열정이 되어주고, 여름에는 파란 냉철함이 되어준다. 그래서 마음의 저울에 다는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상처의 키가 그리 높아도, 살아 나간다.
그 아름다움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주말의 달콤한 기억들을 씻어내고 ‘회사 모드’로 갈아타자. 빨리.


아니마가 깨어났고, 아니무스와의 균형을 그리고 삶의 중용을 이루기 위한, 또 영원히 지키고 싶은 하나를 위한 길.


형편이 되는 위치에 있을 때 도와주면 좋을 텐데, 자꾸 군림하려 든다. 세상은 변한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행복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영원히 추억으로 변질되지 않을 것 같다. 오감에 각인된 기억은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속에 또렷하다. 떠올리며 어림 잡아 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기억의 나무 아래에서, 때때로 영혼의 휴식을 즐길 수 있을까.


어떤 대상과 교감을 나누는지에 따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책, 음악, 예술 작품들. 그리고 사람. 힘들어도 꼭 해보기를.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단순한 진리를 홀대하는 시대다.


그대여, 긴 하루의 끝에 매달린 마음에는 노오란 굳은살이 박여 있네요. 저만치 앞서가는 욕심도 없는데 그대는 왜 그리 고달파 보이나요…….


이젠 바흐의 마니피캇에 빠졌다. 나는 바로크 세계를 떠도는 ‘서정적 방랑자’가 되었다. 한 때는 ‘서사적 인간’이었는데. 틈만 나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친다. 바흐는 너무나 좋은 곡들을 너무나 많이 남겼다. 한눈팔 틈을 너무나 안 준다.


내 어리광의 안식처, 유희의 무덤, 욕망의 뿌리, 두려움의 샘, 본능의 증거, 밀어의 화원, 파문으로 일렁이는 호수, 잔잔한 떨림, 꺼지지 않는 위안, 뜻밖의 행복……


221208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크고 깊은 기쁨. 그리고 그로부터 솟아나는 행복과, 그 모든 순간순간, 온 영혼을 흠뻑 적시는 영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나의 기록들은 ‘청신체 dolce stil novo, 달콤하고 새로운 문체‘인가. 이것은 ‘신의 사랑’을 노래하던 방식이었지. 나는 조금 다르게 써본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었을, 인간, 자연, 화폐에 대한 가치를 매기는 행위를 저지른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려면?
그것은 ‘나눔’이 아닐까. 물컵 속의 잉크가 퍼지듯. 예수가 보여주셨듯.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2시간이고, 15에서 65세까지라고 어림잡으면 50년의 10%인 5년을......? 기대수명에서 빼야지 않을까.


221207
두터운 외투를 벗고 지하철 좌석에 앉으니 마음에도 공간에도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


텍스트는 그 모든 단계에서 작가가 부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읽혀진다.
-롤랑 바르트- 작품은 작가를 죽일, 작가의 살해자가 될 권리를 소유한다.
-미셸 푸코-

나는 나의 상상과 생각을 기술하지만,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시오.


다시 파르티타와 함께 단테의 우주로 진입한다.

그런데 말해주오. ‘사랑의 지성을 지닌 여자들로‘ 시작하는 새로운 시를 끌어낸 그 사람을 내가 여기서 보고 있는지를. 내가 그에게, “나는 사랑이 숨을 불어넣을 때 받아쓰고, 안에서 불러주는 대로 드러내며 가는 그런 나라오.“ -[연옥] 24곡 49-63중에서, 단테-

별안간에 여동생들이 늘었다. 일일이 다 신경 못써줘도 너무 섭섭해하진 말길. 그리고 예쁘게 봐줘서 고마워요.


사람들은 잘 모르는 듯. 누군가에게 동기를 부여하면 얼마나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말을 물가에 데려가더라도, 목마르지 않으면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는 말이야.


늦지 않은 밤인데, 이미 꿈속에 젖어있다.
꿈같은 현실일까, 현실감 가득한 꿈일까.
나는 정녕 내가 아는 사람들이 사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가끔씩 그때 그곳에 다녀오는 것인가.
작지 않은 슬픔인데, 이미 행복 속에 빠져있다.
행복 같은 슬픔일까, 슬픔 가득한 행복일까. 그래 현실은 곧 꿈이고, 행복은 또 슬픔이기도 하다.


221208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우리의 이야기 같다. 화려하고, 몽환적이고, 힘차고, 극적이고 그런데 또 차분하고, 우아하고, 목가적이다. 하지만 그 어느 부분도 지루하지 않다. 아무리 좋은 것도 익숙해지면 평범한 것이 되고 말지만, 그 안에는 약간의 무료함도 없다. 그리고 반복되는 테마와 주제어들.
절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절정을 지나 끝맺음까지 약 2분 정도의 마무리. 운명적인 해피 엔딩을 위한 원숙한 절정. 기쁨과 행복과 영감이 가득하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있다. 근데 가끔씩 구글 포토가 알려줘. 굳이 피할 필요가 있을까 해도, 또 굳이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즐겁지 않았던 지나간 시간들아, 내 곁을 떠나 줘서 고마워.


AI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인류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던 일런 머스크가, ‘오픈 AI’라는 최고의 ‘초거대 AI’ 개발 회사를 공동으로 창업했다니.
구글마저 밀어낼 ChatGPT 3.5 무서워.


의외로 경미한 틱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주로 젊은 남성들. 원인이 무엇일까. 후천적 신경전달물질 체계의 이상?


불안함은 늘 호시탐탐 우릴 노린다.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가루를 뿌려대며, 근심의 밧줄로 생각을 결박하고, 걱정의 고삐로 이성을 충동질한 후, 의식의 숨통을 조여 온다.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얼마나 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우리는 행복을 확신할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욕망과 또 얼마만큼의 두려움이 내게 남아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묘비명, 니코스 카잔차키스 -

이제 보니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것‘이라고 느끼며 살아왔구나.


아쉬울 때마다 일단의 무리들이 애용하는 단어 ‘국민’. ‘궁민’ 아냐?


221206
어제 보다 5도 높음. 좋다.
잠을 적게 자는 것이 수명을 늘리는 한 방편이 될까. 잠들어 있는 시간을 뺀 수명을 고려한다면 말이 된다.


한국 남자들이 원래 이리 찌질했었나. 아 참 나도 한국 남자지.


눈이다! 눈이라면 지겨울 정도이지만, 그래도 다소곳이 내리는 함박눈은 예쁘다. 사박사박 소복소복.


주름, 새초롬. 참 멋진 사람이야.


조용히 앉아서 연단에 선 누군가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어. 일평생 꿋꿋하게 변함이 없다.
몇 번의 혼절 뒤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도 공부를 싫어했는데, 통틀어 22년 동안 공부를 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


그대의 얼굴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무더운 날들 속에서 떠올렸던 모습은, 도무지 또렷하지 않았습니다. 향기도 촉감도 모두 머나먼 곳에 떠도는 나의 꿈같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잎사귀들이 대지의 부름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 위를 구르다가 사라져 버린 날들이 지나고.
별안간 문을 두드리고서는 내 앞에 서있는 그대.
그대의 몸은 주름지고, 얼굴이 투명하고 또 하얗고 새초롬하고, 그리고는 정말 선명해졌습니다. 그대여, 겨울이여.
나의 옷과 마음을 여미게 하는이여.


문득 그 형이 ㅅㅐㅇㄱㅏㄱㄴㅏㅆㄷㅏ.
무척이나 춥던 어느 겨울날, 비닐을 둘러친 데크 위의 오목했던 술자리도 떠오르고.
우리들의 이름이 그려진 찻잔도.
어릴 적부터 함께 나누었던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와 또 이야기와 그리고 이야기들.
함께 불렀던 노래와 이름들. 보잘 것 없던 바램들.
늘 조용히 바라봐 주던 형.
그리워. 보고 싶네. 많이.


221205
안녕~ 사람들아, 잔잔한 새벽 아침아.
매일 매일이 특별하지만, 오늘은 더 의미 있는 날이다.


앜! 이게 뭐람. 쾌적한 아침을 위한 수면 버스가 고장으로 못온다니.


월요일 아침에는 왜 화장실마저 붐빌까. 주말에 뭐하고선••••••
똥도 버리기 아까울만큼 귀하다던 아이가 떠올랐다.


내 젊은 날의 모습을 끄집어 내 주는 사람들이여. 난 그대들에게서 그대들의 가장 싱그럽고 자랑스러운 모습을 찾는다. 나는 그 모습에 걸맞는 이가 되려고 나의 그러한 모습들을 발현해 내고, 그로써 우리는 오랫동안 잊었던 방식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


비트 코인 등락 그래프를 보는 이, 난 손을 움직일 수도 없는데 그 틈바구니에서도 드라마를 보는 아가씨, 여친과 다투는 청년, 내 얼굴 왼편에 정수리를 거의 닿다시피 방아를 찧으며 졸고 있는 아줌마, 세상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있을까.
어쩌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는 바로 내 자신이잖나?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한 그런 우리들 말이다.


콩닥 거리던 시간도 이제는 모두 지나갔다. 두근거렸던만큼의 부산하고 어지러웠던 시간도, 모두 기억의 영역으로 사라졌다.
왜 우리에게는 늘 고대하던 순간들이, 그 만큼의 환희를 담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남게 될까.
아마도, 배려라는 이름의 사랑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중얼거렸다. 실망하지마. 너의 확신 보다 더 정확한 미래는 없으리니.


221204
아이가 타고 있다는 스티커를 붙이고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는 운전자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설마 그 '아이'가 '예비 아이들'은 아니겠지.


네 개의 꿈이 있다. 그것들은 흡사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같다. 추위와 따스함의 어울림 속에서 자라난다.


221203
어제 지인들에게 말했었다. 한국이 2:1로 이긴다고. 봤지?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주위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 걸 바쳐 승리한 후 흘리는 저 뜨거운 눈물과 절규. 나도 울었다. 울보들이면 어때. 매 경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저 사람들 너무나도 아름답다.
유효기간 없는 내 맘 속의 ‘까임방지권’을 헌정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 먹으며 '불후의 명곡'을 시청한다. 많은 출연진들을 보시며 말씀하신다.

저렇게 가수가 많으면 나랏일은 누가 다 한다냐?

이토록이나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계셨다니. 나는 아무래도 어머니를 닮은 듯하다.


이 사진, 실물 보다 더 잘 나왔다.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파르티타 (모음곡) 1번 (BWV 825)에서 6번 (BWV 830)을 듣는다. 결벽증이 심했고, 바흐 속에 자신의 짧은 삶을 내던졌던 독특한 피아노 연주가 굴드. 화가들이 색의 배합과 질감과 채도와 명암과 구도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듯 그도 자신의 색깔로 가득한 연주를 한다.

내가 연주하는 나의 삶. 장단조가 있고 빠르기와 세기가 버무려져 있다. 나의 악보를 그려내고 그에 맞춰 울림을 전한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를 꿈꾸며 이어가지만 그것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나의 악보는 그냥 단음들의 연속일 뿐.
나 아닌 누군가의 연주가 섞여야 하고, 음계가 같아야 하고, 겹치는 음의 화성이 맞아야 하며, 박자도 일치해야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내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이전에 가본 적 없는 길을 나선다.


221202
물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쓱 내렸다. 근데 대답이 JS는 41, EC는 43. 나 어떡하니.
이 사람들 참 좋은 사람들 같다.


내 앞에 전형적인 ’마님‘ 걸음걸이로 팔을 휘저으며 걷는 아가씨가 눈에 불쑥 들어왔다. ‘마님’들은 세상 급할 게 없어 보인다. 어찌 저리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 멋져!


왜, 왜? 털 슬리퍼를 신고 다니지? 앞머리 헤어롤에 적응되고 나니 또 새로운 미스터리가 등장했다.


이상해. 꽉 찬 지하철 안에서 팔을 움직일 수 없을 때 왜 그리도 얼굴의 이곳저곳이 번갈아 가며 간지러운거야. 니들 짰냐?


친구네 치킨집에 갔더니 또 다른 친구들 두 명이. 아 근데 이 녀석들 완전 노땅이야. 아이고.
난 41인데.


세월은 거센 바람.
파릇하고 여렸던 우리들을 순식간에 지평선 언저리로 몰아다 놔버렸다.
바람의 품 속에서 휘돌며 보았던 세상은 그저 편평하고 넓은 곳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가장자리에 서서 뒤돌아보니, 검푸른 숲과 웅장한 산맥들이 얽힌 곳이었구나.


네 안에 웅크리고 있는, 새벽 같은 신선함과 초여름 한낮 같은 열정, 고요하고 두터운 아름다움, 아름다움, 아름다움.


221201
통근 버스-이건 사실 취침 버스, 꿀잠 또는 단잠 버스- 안에서 세상모르고 자다 깨서 벌떡 일어난 나는 소리쳤다.

악! 지금 여기 어디죠?

다행히도 내리는 곳 바로 전이었다. 서서히 정신이 들고나니 창피함이 물밀듯 밀려왔으나,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약간의 혼미함과 창피함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만난 JS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MBTI가 모예요?

난 EXXP.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소식들. 나의 이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열심히 사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마다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린다.


여성들은 얼굴도, 피부도, 머릿결도, 손발 모양도, 몸매도 고와야 하고 마음씨까지 착해야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다니? 잘못 걸리면 맞아 죽을 말이다.
그런데 그 어떤 남성이 아무리 멋지다고 한들 이런 여성들을 능가할 수 있나? 감히 남성이라는 무리들이 범접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여성들이 맘만 먹으면 어느 나라건 문화•예술•연예계를 즉시 말려 죽일 수도 있다. 그 폭넓은 공감 능력과 예술적 감각이 충만한 이 존재들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이 아직도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것은 그분들 덕분이다.
근데 이건 누가 시켜서 쓴 게 아니다.


지하철 좌석 줄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실례합니다‘를 나지막이 전하며, 백팩을 선반 위로 들어 올리려던 나는 ••••••.
아 뭐야 선반이 없다. 슬그머니 백팩을 다시 안았다. 정확히 세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오늘은 ’ 창피함의 날‘인 것인가. 정녕.


기쁨, 행복, 영감

그냥 피어난 꽃이 아니었다.
화원의 모든 꽃들이 시들거나 일 년생의 기한을 마감할 때에, 홀연히 피어난 보라색 꽃 한 송이. 그런데 나는 이름을 모른다.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다. 모르면 어떤가.
때때로 마주하는, 투명하지만 꽉 차있고,
은은하지만 화려하고, 차분하지만 열정적이며,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사랑을 가득 담은 꽃.
내가 바친 꽃말 기쁨, 행복 그리고 영감.
영원하기를.


221130
날씨처럼 추운 몸과 들려오는 이야기들. 그런데 마음속 한 광장에서는 매일 밤 축제가 벌어진다. 떠들썩한 대화와 믿음의 속삭임도 있다. 한가운데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흔히 알던 불꽃이 아니다. 욕망이 없어도 꺼지지 않을 궁극적인 열정이다.


그곳은 테스트베드. 세계 최초, 최고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남루한 현실을 잊으려, ‘우리의’ 가장 자랑스러운 모습을 내 것인 양 뿌듯해하며 살아간다. 왜 나의 고통을 담보로, 타인들의 우주를 빌려와 그 고통을 달래야 하나.
그곳은 시험대, 보기 드문 변화와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 사는 곳.


아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나도 잘 모르겠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저 단편적인 모습들일뿐. 그 조각들을 합쳐봐도 어떤 정형이 나오지 않는다.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우마무스메’가 도대체 뭐지? 왜 선두에 왜 서고, 엄마를 어떻게 기쁘게 하겠다는 건지. 그것도 게임으로? 난 왜 자꾸 ‘어머 머스마‘로 보이는지. 방파제 나라에서 물 건너온 게임인 듯.


단테의 [신곡]을 읽다가 주춤하고 있다. 자꾸 딴생각만 들고 집중이 안된다. 성이 ‘안’이면 ‘안단테?’ 옛날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난 이제 고전들을 읽기에는 너무 되바라진 사람이 돼버렸을까. 해설서를 찾아봐야겠다.


아 정말 나를 툭툭 치며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미치겠다. 난 꼬박꼬박 백팩을 앞으로 메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는 거지? 에이 안 그러는 거지들.


지하철 안에서 한 여성이 통화를 하는데 노 젓듯 팔을 엄청 휘두르고 있다. 왜 저러지? 근데 내 쪽을 보고 있어서 웃을 수가 없다. 나 보고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내가 끄적거리는 글 속에는 여러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 하나를 건드리면 엉뚱한 것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다른 장치들이 연쇄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재밌다.


잠 못 이루는 밤. 쉴 새 없던 함박웃음 뒤로, 세상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이 가득하다. 숨겨 놓은 보석 세 개를 함께 나누는 분, 고마워요.


221129
살얼음을 걷는 동행인데 모든 것이 완벽하다. 늘 이러지 않았었다. ’갇힘‘을 피하려다 올무에 걸릴지도 모른다.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도시 속의 나는, 비도 바람도 달갑지 않다. 먼지와 삶의 애환과, 다니며 흘렸던 상념들을 씻어버리고 흩어버리길 바라는 정도의 기대뿐. 하물며 비바람은 어떠랴.


한 나라 온 국민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울지 짐작조차 어렵다. 그 몇 일간의 사투를 위해 감내하고 희생했을 그 사람들의 소중한 것들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드립니다.


어제는 안보였던 JS가 나타났다. 감기 때문에 결근. 빨리 낫기를 바래.


우리 모두 곱고 아름답고 좋은 것을 쫓지만, 정작 그것을 어떻게 아끼고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열정은, 쫓을 때만큼의 그것 보다 간절하지 못한 듯하다. 그건 아니다.
아름다웠던 것들아, 사람들아, 시간들아 나를 용서하길.


젊은 아가씨-임신 중이 아님이 확실한-가 임신부 석에 앉는 것도 모자라서 다리까지 꼬고 있다. 그녀가 얄미워 보이는 건 얼굴 마저•조차•까지•이나마•씩이나 예쁘지 않아서는 절대 아니다. 예쁜 사람이라도 용서 못해! 못하는 게 바람직해, 못할지도 몰라, 못할 거 같애, 못하지 못하면 어때. 뭐.


221128
너 나 보고 있니? 나도 널 보고 있다.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그래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을 마주 하자.
Bring them on!


사랑하는 이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가슴으로 삭히고 있는가. 그런데 정작 누군가와는 이를 나누고 있다. 때로는 그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도 한 것을 보며,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래지 않아 명이 다할 사람들이, 삶을 너무 의미 없고 메마르게 살고 있다. 죽기 전에 그것만이라도 깨달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참 열심히 살았다며 ‘용비자찬가’를 읊조리다 가겠지.


비가 온다는 걸 말해주지 못한 게 엄마 잘못인가? 엄마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우산을 쓰고서 정거장 지붕 아래 서있는 사람은 뇌가 없는 걸까? 우산 없는 사람들은 어쩌라고.


221127
‘잔소리를 하는 세계’에서 ‘잔소리를 듣는 세계’로 돌아왔음을 실감하고 있다.


옆 사람의 통화 내용만 엿들어도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고전을 읽고, 명화와 명곡을 감상하는 이유. 정말로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퍼부어 왔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나도 그들과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


잔잔한 즐거움이란 이런 것인가. ‘훅’ 소리가 나면, 멋쩍은 웃음이나, 짧은 침묵이 뒤따른다. 구석구석 감춰져 있던 다양한 모습들이 자연스레 피어 나온다. 민들레, 데이지. 그 화원의 가장 깊은 곳에 피어 있는 아름다움.


221126
세찬 바람과 휘도는 먼지. 저 멀리 나트륨등 불빛 번진 길 위로, 머뭇거리듯 빠져 나가는 흰색 차 한 대. 그 어느 한 도시의 새벽 풍경이 담긴 마음을 쓰다듬으며 들어선 대합실.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남자, 떼 쓰며 우는 아기, 직원 없는 데스크에서 공허하게 울려대는 전화벨, 쉴새 없이 통화 중인 짧은 머리 아줌마, 서서히 밝아 오는 널따란 창, 그리고 한 편의 공연을 마치고 서서히 무대를 떠나는 나.
‘다음 거는 언제, 어디?’


옆자리 꼬맹이 아가씨가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린다. 응? 이별의 아픔? 슬쩍 보니 무슨 편지 같은 걸 들여다 보고 있다.
나중에 물어보니, 6개월 정도의 어학연수 동안 함께 지냈던 친구들의 ‘작별 편지’. 그 마음이 참 귀엽다.


221125
정말이지 어렵사리 웹사이트 하나를 찾아내서 우루과이전 중계를 봤다. 근데 나는 여전히 '난 인간'임을 또 느꼈다. 어떤 선수가 실수를 하자, 대뜸 주뎅이에서 "아이 저 XX 같은 X"이라는 '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 선수라고 그러고 싶었을까. 미안해요 ' 넣은 선수'.

머리에 쥐나죠? ㅋㅋㅋ https://image.newsis.com/2022/11/24/NISI20221124_0019506115_web.jpg?rnd=20221124232602


221124
왜 개인 핸드폰의 채팅앱을 업무에 사용하는지 잘 모르겠다. 삐삐 -> 핸드폰 -> 채팅앱. 이게 진화이고 발전인가? 누구를 위한? 서로가 서로를 너무 피곤하게 해.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이태원 참사 이후 여기 저기서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대책을 세우고 야단들이다. 쓴웃음이 나온다. 대책이 없어서 참사가 발생하나? 그리고 그 대책은 죄다 하급자들만이 감내해야 할 몫인가? '관리와 경영'이라는 개념은 없고 '지시와 명령'만 있는데, 그거마저도 안 하거나 못했으니 그 참사가 발생한 거잖아. 설마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221123
몇 년 전의 일기들을 정리하면서 들여다본 지난 시간들. 지나고 보면, 아쉽게도 즐거움은 항상 기쁨이 아니었고, 다행히 어려움은 늘 고통이 아니었다. 당시의 단면밖에 볼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겪는 일들이 좋은지 나쁜지는 당장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행이라 여겼던 일들도 결국은 고통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라며 한탄했던 일들도 종내에는 행운의 시작이기도 했던 지난 시간들. 그러고 보면 일희일비할 것은 없다.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 가까이 왔으므로, 행복은 그냥 그대로 감사하면 될 일이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너무나도 멋진 말이다.


둘도 없이 친한 지음이면서 연인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이성 사람을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일탈? 탈선? 없는 삶 속에서, 상상으로 그려왔던 그런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나이가 더더더 들어 몸이 많이 부실해져서, 젓가락 들 힘도 없어지면 가능하려나? 궁금하다.


221122
대한민국이 여러 면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많다. 아직도 '우리'끼리는 편견과, 거짓과 무례함을 휘두르며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을 대하거나 외국에 나가서 하는 행동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부도덕한 권력도, 다른 나라나 세력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도울 수 있을 때 진정한 강소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 수 없이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이슈화 하면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이들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분열은 곧 누군가의 돈과 권력이 되는 것을 왜 보지 못할까.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보면 의외로 문제가 쉽게 보인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2008년 어느 날의 모임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14년이 넘었다. 단톡방에서 다시 본 이름들. 한 때 우리는 정말 끈끈한 유대감 속에 묶여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세태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 구분할 방법은 없을 듯. 그렇다면 '나이가 든다'와 '세태가 변한다'는 논리적으로는 동일한 의미이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할 테니. - 이제 그 유대감은 녹슬고 해어졌지만, 여전히 그 이름만 봐도 반갑고 보고 싶은 마음만은 남아 있다.


잠들기 전, 두 손을 모은다. "나를 위한 기도가 다 무슨 소용인가. 노력하는 만큼 나는 변화하고, 그렇게 또 조금씩 더 나은 인간이 되면 될 텐데······." 라며 의기양양하던 그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위에 대해서 만큼은 신념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손을 모은다. 때로 사랑하는 이들의 치유와 회복과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읊조렸다. 그가 잠시나마 아름다워 보였다.


221121
요즘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연주들을 볼때 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체력이 약하면 하기가 어려운 것이 예술인 듯. 이 분들도 한 체력 하는 분들 같다. 내가 아는 분도?
유튜브가 제공하는 선한 혜택들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다. 많은 것들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생수가 되기도 한다.

Trio Quodlibet 연주 @ 산 비탈레 대성당 (Basilica di San Vitale) - 이탈리아의 산 비탈레라는 소도시에 있는 대성당. 도시가 강원도 스탈인가 보다. 사진을 콕 찍으면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조금 전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의 전혀 색다른 모습을 뵙고, 적잖이 놀랐다. 인간 속에 내재하는 그 무한하고 다양한 가능성들이 배어 나올 때마다 보는 나는 전율한다. '색다른 모습'이란 또 하나의 가능성. 하물며 그 모습이 내가 그려봤던 모습이라면.
분명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다.


221120
두 개의 시간 속을 사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상념에 더해진 근심 하나까지. 워낙에 잠을 적게 자는 나도, 몸의 리듬이 갈팡질팡 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때때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 요즘 내 자신이 얼마나 그 빛의 원천 속에 깊숙이 붙잡혀 있는지 또 다시 깨달으며 끌려가고 있다.


221119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원망하며 낙심하기 보다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하면서, 해결하기를 원하는 한, 그 문제는 더 이상 나를 쥐고 흔들어데지 못한다. 내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나를 붙잡아 놓고 쥘 수 없다. 그 동안 나는 더 많은 조력자들을 만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뿌려 놓은 가장 큰 불행의 씨앗은, 젊고 어린 세대들이, 그나마 균형을 유지하며 꾸려왔던 사회 시스템에 어떤 방식으로든 적응하고, 건강한 견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221118
내일은 조금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답답하고 힘들어도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 둘, 셋을 세고, 감정은 감추고 진심을 앞에 내세우자. 아무리 큰 진심을 담고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이 드러날 수 있도록 표현하지 못하면, 지나치는 사람에게 베푸는 가벼운 친절보다 못하다.


현실이 지옥이야. 여기가 천국인줄 아니? 지옥에 온 이유가 있겠지. 벌 다 받고 가면 되겠지 뭐.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의 대사-

나는 우리가 지옥과 천국을 넘나들며 살아간다고 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것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될까. 그럼 죄 많은 사람은 오래 사는 거야?
어떤 작품을 만들어도, '사필귀정'의 틀은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마저 없다면 지옥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상받을 길을 찾기 어려울 테니. 얼마만큼의 '현실'과 얼마만큼의 '이상'을 섞어야 되는지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다. 작품 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그대는 자거나, 바쁘거나 또는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겠지요. 생각의 덩어리들이 해석되기를 거부하기 위해 암호화 되고 있거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불가지의 영역 속에 묻혀 있겠지요. 그대여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하루에 몇 번은 나를 떠올려 주세요.
겨울 해가 가녀리면, 의식의 지평선 위로 잊었던 달을 밀어올리듯······


쓰레기를 누가 ‘무단전재 및 재배포’ 할까. 손에 오물 묻어. 걱정할 걸 해야지.


221117
'장수'가 축복이기보다 이제 당신들은 물론 그 자손들도 몸살을 앓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되어 버렸다. 당신들은 늘어가고 그들을 부양해야 되는 이들은 줄어가는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리를 지키기 위한 고통 속에 놓여야 할까. 안타깝다.


'인간관계'의 너비는 곧 나의 폭이자 영역이다. '확장된 나'.
주소록에 담겨진 그 수많은 사람들? '아는 사람들' 일테지.
한 때, 우리는 폭이 넓은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어르신들과 아이들의, 그리고 경제활동 세대들 간의 연대. 지금은 너무나 단출해진 그 '공동체'를 흉내 내며 우리는 쉽사리 언니, 오빠, 형, 동생으로 통한다. 지금은 흐트러져 버린 그 '공동체'의 크기만큼 우리의 댓가 없는 뒷배도 줄어 버렸다. 지금처럼 가녀린 '가족'이 무너지면, 의지할 수 있는 내 맘 같은 이들을 찾기가 어렵다. 지금 우리가 더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함께' 또는 '모여서' 살기가 불편한 세상이다.


어떤 분이 내게 물었다. 감정이 (확! 올라서 팍!) 묻어버린 (Buried) 단상이냐고. 아니지 말입니다. 감정이 묻은 (Touched 또는 Stained) 단상 (斷想)이다. 혹시나 해서. 이 '단상'은 연설이나 강의를 위한 그 단상 (壇上)이 아니고 '짧은 생각', '스친 생각', '불현듯 떠오른 생각', '단편적인 생각'이다.


221116
그동안 잠잠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몰린다. 태풍 전야 같더니만 결국. 4 명을 동시에 상대하며 일을 처리하려니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고, 마우스는 까만 패드 위를 이리저리 질주한다. 군대에서 행정병을 안 했더라면 어찌 살았을까 싶다. 두들겨 맞으며 배웠던 타자가 이리도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나에게 티파사는 이 세계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려 내놓는 무슨 극 중 인물들 같이 보인다. 그 인물들처럼 티파사는 증언한다. 그것도 씩씩하게. 티파사는 오늘 나의 인물이다. 그 인물을 쓰다듬고 묘사하고 있노라면 나의 도취감은 끝이 없을 것만 같이 여겨진다. 사는 시간이 따로 있고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도 따로 있다. 그건 좀 덜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
-[결혼·여름] 중에서, 카뮈-

이 짧은 한 구절이 왜 그리도 내 마음을 흔들었을까. 길다란 산문의 극히 일부분인 단 한 문장. 나는 내 몸 전체로 - 나의 감각과 활동과 몸 전체로 대상을 받아들이고 느끼며 - 살고 있나. 그리고 온 마음을 담아 그 삶을 증언 - 묘사하고 표현하고 또 창조하고 그리고 자유를 만끽하고- 할 수 있나.
진정 그렇게 해보고 싶다.


아! 정신없이 일하다가 샤워하는 걸 잊어버렸다. 된장.


221115
주요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뭔가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느낌이 든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시청하게 된 [슈룹]. 의상과 배경들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내 몸이 내가 존재하는 시간의 틀 속에 재빠르게 적응해 가고 있다. 이미 오래전 이곳에 발이 묶였었던가.


도대체 왜? 몰카에 그리도 집착하느냐 이 미친 찌질이들아. 소중한 인권을 반인간(Inhuman)들을 위해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말았으면. 인권의 가치는 매일 추락하고 있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간 다 죽어!

221114
새벽 2시까지 일하는 맛이란. 그래도 5시간의 여행은 없다.
너무나도 시간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 하루에도 몇 번을 시간과 씨름을 하나. 크로노스와의 힘겨운 사투 속에서도 끊임없이 카이로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리는 카이로스여. 왜 내가 그때 그의 앞 머리카락을 잡지 못했는지 깨달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여. 때로는 뒷모습도 남기지 않는다.
고대하던 날짜들을 세다 보면 피하고 싶은 날은 점점 더 가까워지겠지.


넓게 열린 푸른 하늘. 붐비지 않는 도로. 느릿한 사람들. 내가 원하는 것들만 모아 둔 세상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꿈은 꿔 본다.


성경 속의 '돌아온 탕자'는 향락의 노예였기에 도움을 받아 벗어날 수 있었지만, 무위-이것은 장자의 무위자연이 아니다.-에 갇힌 이들은 자신의 의지 없이는 벗어날 수 없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셨을까. 이런 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221113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헤아려 봤다. 곁에 있어도 손이 닿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책임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들은 또한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의 존재는 그 '관계' 속에서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나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사람들.
나는 누가 필요하지?
갑자기 쏟아지는 이미지들을 담으려고 생각 주머니를 활짝 열었다. 단비 같은 이미지들로 주머니가 물들었다. 오랫동안 색깔이 바래지 않을 것만 같다.


결국 또 예정에도 없던 이별을 맞이했다. Let go! 50여 년 간 함께 했던 기억은 희미한데, 또 한 명의 동지를 보내야만 했다. 그 긴 시간도 아랑곳없이 이리도 허무하게 헤어져야 한다니! 그나마 하루 세 번은 그 동지를 기릴 수 있다는 생각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O mio babbino caro. Mi piace, è bello, bello······ 오, 사랑하는 나의 아빠! 나는 그 사람이 너무 좋아요······
이탈리아 남성들이 '주의' 수준이라면, 여성들은 '경계'를 훌쩍 넘어 '심각' 수준인 듯.


221112
닭고기 오돌뼈를 잘못 씹는 바람에 금 간 이빨이 더 부서진 듯. 3주를 어찌 버틸지.


11일에서 11일로. 하지만 마음은 12일에.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온 듯한 느낌. 익숙한데 낯설다. 감각은 어리석고 교묘하지만 또 위대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다.


하프시코드 (쳄발로)의 가냘프고 숨 가쁜 질주가 끝나면, 저리 비키라는 듯 목청 높은 악기들이 들이닥친다. 브란덴부르크! 재 묻은 영혼의 가장자리를 씻어 준다.


확실히 소변기가 높아.


도착하기 전에 빨리 유쾌함과 여유로운 마음을 복구시켜야 한다. 무대로 나서기 전 같은 마음.


너 누구니? 아휴 우리 복실이. 저 문 너머에는, 계절의 이름에 걸맞지 않는 풍경의 사계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뒤뜰 데크에 서서 북두칠성을 찾아봤다. 오랜만이고 또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번뜩이며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져 버린 별똥별. 그 짧은 순간을 앞세워 기다란 소원을 빌었다. 마지막에 덧붙인 꼬리말.

선한 이들의 소소한 소망들 이루어 주세요.

221111
평상시와 다른 금요일 아침. 역시나 여행 준비에 젬병인 나를 다시금 확인한다. 뭘 싸야 되지? 나는 집돌이 체질인가.


치과 이름이 ‘바로세움’? 작정을 하고 임플란트에 매진하는. 그럴 거면 ‘바로박음’이 나을 듯.


전용기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취재하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왜 내가 다 부끄럽지.


영상 20도와 영하 25도.


야쿠르트 아줌마가 박스를 타고 다닌다. 와.


큰일 났다. 엄청 귀여운데 시끄러운 꼬맹이가 동승했다. 안녕 마스크.


221110
비발디의 [사계] 때문에 눈물이 날 뻔했다. 바흐와 비발디는 사랑하는 여인 같아. 다시 음악가로 태어나는 꿈을 꾼다.


JS와 EC에게 블로그 주소를 알려줬다. 한동안 못 볼 거라며. 근데 비밀글들은 못 본다고 ㅋㅋ.


두 개의 세계 속을 번갈아 가며 살고 있다. 음표의 바다 그 수면 위로, 현실 세계를 호흡하는 호스 하나 올려 물고 잠긴 세계 하나. 그 바다를 그리워하게 하는 다른 세계 하나. 두 세계 다 글자들이 우거진 숲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도 어느새 숲 속에 선 나는 햇살처럼 쏟아지는 영감에 젖는다.
어느 곳이 현실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노인들은 대화가 필요하다. 작은 친절에도 마음이 열리는 그들은 아이들 같다.


알코올은 인간의 불을 끄고 짐승의 불을 붙여놓는다.
-프랑스의 병영에 붙은 포스터, [카뮈의 작가 수첩 1]에서-


뭔 소리야? 난 동의 못해! 때로는 알코올이 짐승을 사람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구!


백곰 껍질 자켓이 유행인가. 통통하게 보임을 교묘하게 권장하는 스타일 같다.


겨울왕국에 가도 춥지 않을거야. 고마움이 일렁인다.

막내 동생의 선물. 그런데 신기하다. 기억하건대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선사했던 •• 색깔이다. 입으면 내 마음이 마냥 물들어 버릴 것만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The Sincerity'가 내 마음에 수를 놓으면 이리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쁨이 스며든다. 그 'TS'는 단 하나의 존재로부터 내게로 젖어든다. 독차지할 수는 없지만, 내밀하고, 귀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내가 불쑥 내민 약속 위에서 언제까지나 함께 동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21109
부시시한 눈에 잡힌 아랫입술의 물집 하나. 메롱 하며 나를 본다. 반갑지 않으니 살며시 사라져 주었으면.
근데 왜 새로 산 헤어왁스에서 한약 냄새가 나지? 이것도 향기인가. 당황스럽다.


이 두텁고 포근한 안개가 옅은 회색빛 파스텔톤으로 세상에 덧입혀진 새벽. 빛이 없다면 안개도 보이지 않는다. 설익은 수돗물을 탄 어항 속 같다.


버스 정거장에 옹기종기 모여 일제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 선생님을 기다리는 아이들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사랑하는 존재들의 흔적을 사진이나 글로만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의 예의가 훨씬 더 아쉬워 보인다. 좋은 인상을 품고 찾아오는 타 문화권 사람들이 맞닥뜨리기 쉬운 실망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근 4 개월 만의 느낌이다.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럴지라도 나는 편견은 거부한다.


221108
어제 늦은 밤, 가까운 어른 한 분의 부고가 울렸다. 내 평생 그분을 몇 번이나 뵈었을까. 늘 그렇지만, 돌아가신대 대한 안타까움보다 함께 한 시간들이 너무 짧았던데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살아계실 적에 베푸신 모든 선행을 사랑합니다. 영면하소서.


JS가 물었다. 어떤 계절을 좋아하냐고. 여름 빼고 다 좋아요. 먼 데서 왔다고 하니 JS, EC 둘 다 깜짝 놀랐다.


착잡한데도 기분은 좋은 내 마음에 쿠로시오 해류가 흐른다. 균형을 이룬 그 물결 속에는, 물고기들이 모여들고, 풍어를 고대하는 어부의 마음으로 되뇌어 본다. 그래 모든 일이 잘될 거야.


221107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를 읽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칠 뻔했다. 조심해야겠다.


바쁜 일상의 피로를 통근 버스 안에서 풀고 있다. 아이러니다.


요즘 들어, 익숙했던 것들에 대한 낯섦과 낯설었던 것들에 대한 익숙함을 느끼는 기회가 많아졌다.

멋지기는 한데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다움은 본래의 자연스러움에서 나오고 대부분은 진심과 본질 속에서 드러난다.


이런 특별한 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오늘 몇 명이나 있었을까. 내일도 또 언제고 되새기며 미소 지을 세 개의 보석, 기쁨, 행복 그리고 영감을 내 영혼 깊은 곳에 담아 놓는다. 잃어버리지 않을 테다.


221106

우리 셋은 꽤 오랜만에 만났지만, 늘 곁에 있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다. 왜지? 그 풋풋한 동질감 그리고 동지애? 한 때는 머나먼 객지에서 정착하기 위해 몸살을 앓았던 우리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 모두 다 잠시 집을 떠난 사람들이 되어 여기에 모여 앉았다. 생존을 위한 각자의 몫이 배어 있는 투쟁의 기억들을 지니고. 그리고 그 기억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산화되어가고 있다.
여기가 원래 집이었는데••••••.

한 잔의 차에 크리스마스가 듬뿍 담겨 있다. 색깔도 맛도 맛있었다.


221105
만남의 약속은 몸과 마음을 모두 깨어나게 한다. 겉모습을 꾸미듯 마음속에도 설렘과 기꺼움을 드리우고, 예기치 못한 즐거움들을 어림잡아 본다.


얼떨결에 이별을 고하게 된 나의 뒷담화 동지 중 한 명. 아팠다. 이젠 안녕.


오랜만이다. 이 싱그러움. 그것은 아무에게서나 볼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사랑의 마음이다. 사랑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은은하고 싱그러워서 곁에만 있어도 즐겁고 행복하다. 그리고 고맙다.


우연히 큰사발이와 함께 앉아 보게 된 오션스 일레븐. 러브 라인으로 아름다운 결말을 맺는 듯 보였다. 그런데 왜 나는 테스가 머니 라인을 따라 아름다운 사랑의 결말을 맺었다는 생각이 들까.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221104
바람 부는 늦가을 날의 새벽. 어스름한 빛과 어둠이 섞인 길 위의 낙엽들이 구르며 까르륵 댄다. 낙엽들은 욕심대로 세상에서 헛되이 굴러가지 않는다.
무슨 즐거운 이야기들이 있는지 나도 듣고 싶다.


이태원을 지나왔다. 고통과 절규가 스며있는 거리가 싸늘해 보였다. 폭우가 아무리 쏟아져도 씻기지 않겠지. 세월 속에 또 남겨지고, 일상에 쫓기는 우리들은 깊은 망각의 바다를 흘러간다.


바람 잦아든 늦가을의 새벽. 잠자는 빛과 깨어난 어둠이 섞인 길 위의 낙엽들이 누워 지난여름을 추억하고 있다. 낙엽들은 그저 하릴없이 헛되이 누워있지 않는다.
나도 그들처럼 계절이 바뀌면 또다시 푸른 마음을 입고 싶다.


221103
저 앞 건물의 맨 위에는 요양병원 그 밑에는 피트니스센터.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나? 그런 생각을 해봤다. 1층에 예식장, 2층엔 산부인과, 3층에 유치원. 4층에는 학원화 된 초등학교. 5층부터는 중고등 학교와 학원들.
그리고 사람들은 더 큰 배움과 성인으로서의 의무와 인생 최고의 자유와 패기가 가득한 시절을 맘껏 즐기기 위해 그 건물을 떠난다.
그리고 가족을 이루면서부터는 가끔씩 들러 2층부터 5층 사이를 들락거린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돌봐줄 사람이 없거나 거동이 어려우면 6층에 있는 요양병원을 통해 그 건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어 7층의 장례식장에 잠시 머물렀다가 옥상으로 올라가 하늘 위로 사라진다.


사람들이 밥을 참 빨리 먹는다. 맞추기가 버겁다.


JS는 문학과 예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EC와 같은 일을 하지는 않는다.


221102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우매한 사람들이 많다. 놀랍다. 고집마저 세다.


도처에 안내 방송들이 너무 많다. 귀가 아플 지경.


이 작고 귀여운 무당벌레는 어떻게 살아갈지. 설마 내 옷소매에 거처를 마련하는 건 아니겠지.

무당벌레가 사람 무당 보다 더 나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 세상.


221101
여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약자들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여성들은 생명의 근원이고, 이들이 행복해야 생명력이 넘치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들이 추악해지면 우리는 금새 무너진다.


언론들이 일제히 경찰을 향해 화살을 쏜다. 그런데 이것은 낯익은 짓이다. 사전 대비가 문제였는데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 대응이 미흡했던 것이 핵심인 양 떠들고 있다. 해경은 잠시 해체되었었는데, 설마 경찰을 해체하지는 못하겠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필요할 테니.


221031
우리 동네의, 낙엽이 자욱하게 뿌려진 길들이 좋다. 일부러 시선을 들지 않아도 가을을 담을 수 있다.


JS와 EC 둘 다 돼지였다. 그 짧은 아침 시간, 우리 셋 모두 미소가 한가득이다.


[산책자의 행복]을 두 번째 읽고 있다.
신념과, 신념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하는 순간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때가 오기는 올까요 라오슈? 아니 홍미영 선생님?
우리는 이리도 얽매인 것들이 많은데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메이린?
노숙자의 손에 들린 플라톤의 [향연]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없지만, 신념과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겨내야 하는지와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에 대한 고뇌가 돋보인다.


세상이 온통 야단법석이다.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엘리베이터에 동승했던 네 명의 아리따운 누군가의 영양들이 하루의 고단함을 칭얼거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이 10월의 마지막 밤 가운데 있지만, 어떤 이들은 전혀 다른 세상 속에 던져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보여줬던 고통에 겨운 얼굴들이 스쳐갔다. 그들은 세월호 세대들이 아니었던가.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21030
사람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또 제물이 되었다.
다수결의 가장 큰 허점은, 질적인 면보다는 양적인 면에 치우친 다는 점이다. 그렇게 선출된 사람들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고에 대한 책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인 양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이후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재발한다면, 그들은 물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느꼈으면서, 그때까지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풍요'를 쫓느라 여념이 없는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좋은 말씀이었다. 그래 그놈의 '풍요' 말고도 내가 쫓아야 할 것이 많다.


221029
사람들의 매너가 대체적으로 좀 아쉽다. 순간순간 배려심 없는 사람들의 우악스러움에 기분이 상한다. 내가 너무 좋게만 생각했던 것 같다. 15년 전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갈까 우려된다.


221028
예상치 못했던 가족들의 연락.


미연이에게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항공기 승무원들이 참 멋져 보였다. 어느 날에는 기어코 캐리어 하나를 장만했다. 오빠의 책 몇 권을 쓸어 담아 넣고 외출을 나갔다. 기왕이면 사람들이 제일 붐비는 홍대 앞으로. 마치 꿈을 이룬 기분이었다.


221027
JS와 매일 아침 "하루에 질문 하나씩 게임"을 시작하다.


확신하지 못하는 것들을 표현할 때의 긴장.


지나가다 본 횟집 수족관의 물고기들이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다. 그것도 잠시. 회가 먹고 싶었다.


221026
카뮈에 따르면, 나는 '유희의 감각을 지닌 사람'임에 틀림없다. 오랫동안 그걸 확인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없는 시간을 내서 마트로 옷을 사러 갔다. 쉬는 날이었다. 아.


221025
상대방의,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의 특성을 집어내고는, 그와 반대되는 색깔의 옷을 입는 나. 균형 혹은 희석에 대한 기대?


221024
다양한 하수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짓과 선동이 대부분인 "뉴스"라는 오폐수. 그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영혼 없는 노동자들.


221023
타인의 작은 실수를 향한 지적의 화살을 쏘는 나.


221021
남을 낮추지 않고는 자신을 높이지 못하는 사람들.


무너가 ㅇ원가 뭔가 사진을 오려야 올려야 도는데 되는데 주변에 찍을케 찍을게 없어서..


지금은 핸드폰이나 공책이나 모두 다 불편하다. 펜으로 긁적거리는 것이 이미 번거로운 일이 되어 버렸다. 일상 속에서 출렁이는 몸이 쓴 글자는, 쓰기도 읽기도 편치 않다. 게다가 어차피 디지털의 창고로 옮겨야 한다.
핸드폰 구석의 작은 자판을 두드리며 자꾸 오타를 수정하다가 번득 떠올랐던, 딱 내가 원했던 생각과 표현들이 날아가 버렸다.
이런 쥔장!


221020
붐비는 저녁 버스 안. 80대 후반의 흰머리 소녀는, 뒷문 반대편 장애인용 공간에 서서 가로막에 기댄 채 봉을 잡고 서있다. 기댄 가로막 앞쪽 너머 의자에는 70대 중후반 흰머리 소년, 그 맞은편 좌석에는 역시 그 소년과 비슷한 나이대의 또 다른 소녀. 뒤쪽 좌석들에도, 누가 먼저 갈지 장담할 수 없을만한 소녀, 소년들이 보인다.
뒷문 근처에 서있는 20대 할배는 큼직한 백팩을 등에 매고 거북목을 한 채 뚫어져라 애인인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다. 통로로 다니는 사람들은 연신 백팩과 부딪힌다. 드디어 70대 중후반 소년이 내리려고 일어난다. 앉을자리가 생긴다. 어? 그런데 그 앞에 서있던 50대 중후반 할머니가 바람소리를 내며 앉는다. 자리가 꼭 필요한 저 소녀는 어떡해.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참는다.


정보를 해석하거나 분석할 능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알고 있다고 자족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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